군수공 인숙(仁淑)은 우계이씨 세계상 10세손으로, 조선 전기에 생존하셨다. 군수공에 대한 기록은 비록 적으나, 세계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들 중 한분이시다.
군수공의 아버지는 호분위경력(虎賁衛經歷) 증 판중추부사(贈判中樞府事) 휘 만(蔓)이고, 할아버지는 고려(高麗)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조(李朝)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관(一等管)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事) 겸 의흥친군위동절제사(兼義興親軍衛同節制使) 퇴은(退隱) 휘 억(山+疑), 증조부는 고려 밀직대부(密直大夫) 추봉(追封, 조선조에는 사후 봉군호를 올리는 것을 추봉이라 하였으나, 고려조에는 증직을 추봉이라 하였다. 추은봉증(推恩封贈)의 약자.) 중추원사(中樞院使) 휘 사성(思成), 고조부는 영동정(令同正) 휘 백경(伯卿)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경주정씨(慶州鄭氏)로, 부인의 아버지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양경공 희계(熙啓)이고, 어머니 서원인 곡성부부인 염씨는 곡성부원군 충경공 휘 제신(제신)의 따님이다.
군수공의 생년과 졸년은 미상이다. 다만 1462년 세조 7년에 표석을 세웠다는 기록을 볼 때<대동보>, 보통 3년거상이 이조의 상례였으므로, 1459년 세조 4년 이전에 별세하셨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군수공은 음보(蔭補)로 관직에 출사하셨던 것 같다. 부친 휘 만이 생전에 고려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종이품관 중추원부사 사재감 등을 역임하시고, 이조초에 정4품관 봉렬대부 호분위경력으로 강등되셨으나, 훗날 종일품관인 판중추부사에 증직되셨다. 조부 휘 억은 조선개국 후, 이태조로부터 가정대부(종2품) 중추원부사 도평의사사사 겸 의흥친군위동절제사의 벼슬과 원종공신 1등관에 녹훈되셨다. 따라서 2품관 이상의 자녀만 음보로 출사할수 있었던 조선후기와는 달리, 조선초기까지는 5품관 이상의 자녀도 음보로 출사할수 있었던바, 공 또한 음보로 출사하실수 있었을 것이다.
공은 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 통훈대부(通訓大夫) 덕천군수(德川郡守)를 역임하시고, 묘표운 일운 판사복시사(判司僕侍事)라 기록되어 있다.<대동보> 또한 해주오씨 오부(吳傅)의 자녀 편에, 공의 관직명이 사정(司正)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공의 초기 관직은 사정을 역임하셨음을 알수 있다.<해주오씨 기록> 그런데 세종실록 18년조의 기사에는 "이인숙을 지덕천군사(知德川郡事)로 임명하니, 사은숙배하였다." 는 기사가 있다. 지덕천군사에서 지사라는 명칭은 조선초기의 관직명이다. 조선 초기의 관직을 보면, 판한성부사, 판광주목사, 지인천군사 등의 호칭이 있다. 이는 훗날 세조때에 이르러 관직명이 각각 판윤, 목사, 군수 등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가령 군수공의 외조부인 양경공께서 역임한 관직명에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로 되어 있고, 군수공의 장인인 군사공(郡事公) 오부의 관직명 또한 지인천군사(知仁川郡事)로 되어 있다. 또한 군수공의 관직명 중에도 판사복시사라는 것이 있는데, 각 시(侍)와 원(院), 감(監)의 우두머리도 조선초기에는 판사로 되어 있다가, 세조이후부터 정(正)이라 개정되었는데, 사복시정, 장악원정, 군자감정 등이 그것이다. 군수공의 사후, 그의 증직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고, 아직까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점은 좀더 찾아봐야 할 점이다.
그렇다면 군수공은 사정, 중추부경력을 거쳐 통훈대부가 되셨으며, 세종 18년에 왕명을 받아 사은숙배하고 지덕천군사로 부임하셨고, 훗날 최종관직은 판사복시사에 이르셨던 것이다. 공은 별세하신 뒤, 양주 선영하(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용정리 성곡)에 장사지냈으며, 세조 7년 임오 1416년 4월에 입석하였다.
상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고, 단편적인 것만이 전하여 공의 생애를 자세하게 고증할 수 없음이 다만 한스러울 다름이다.
영인은 4남3녀를 두었다. 장남은 경창(景昌)이고, 관직은 직장으로 출사하여 봉렬대부 군자감주부에 이르렀다. 경창은 순흥인(順興人) 직제학 증 좌참찬 안구(安玖)<순흥안씨 기록에 의하면 안구의 증직은 좌참찬이라 한다.)의 따님과 결혼하여 도촌(桃村) 수형(秀亨), 말형(末亨)이고, 따님은 직강 정이득(鄭而得)에게 출가하였다. 도촌 수형은 음보로 선무랑 전생서령 조봉대부 평시서령을 역임하였으나 세조의 찬탈에 반대하고, 단종대왕에 대한 일심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영천 도촌으로 낙향하였으니, 철종조에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고종조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도촌은 예안인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따님과 결혼하여 대근(大根), 양근(養根), 준근(峻根), 성근(盛根)의 네 아들을 두었다. 말형은 지근(支根)을 두었다. 차남은 경연(景衍)으로, 소위장군 행충좌위부사정을 역임하였는데,(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의 세보기록에는 호군으로 되어 있다.)따라서 그의 최종관직은 호군이었으며, 훗날 통정대부 형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의령인 교리 남숙문(南淑文)의 따님과 결혼하여, 충찬위 선무랑 목청전직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징(徵), 숭(崇)을 두었다. 징의 아들 지방(之芳)은 1489년 성종 20년 무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경상좌도 경상우도 등의 절도사를 역임, 변방에 근무하며 여러차례 야인들을 격퇴시켰으니,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과 대동야승에 기록이 실려있다. 삼남은 경생(景生)으로 사정을 역임하였다. 곤(崑)을 두었다. 사남은 경화(景華)로 사과로 출사하여 봉렬대부 군자감주부에 이르렀다. 순릉참봉 종만(種萬)을 두었다.
장녀는 진주인 류자문(柳子文)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이승청(李承請)에게 출가하였으며 차 삼녀는 청송인 심준(沈濬)에게 출가하였다. 류자문은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한림사예 지제교 전랑을 역임하고, 좌익원종훈으로 참판에 증직되었다. 2남1녀를 두었는데, 외손 한평(漢平)은 진사 증 판서이고, 한 장(漢章)은 생원이며, 외손녀사위 이삼양(李三陽)은 부사 증 참판이다. 이승청은 무후이고, 심준은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내외자손 다수가 번성 현달하였으니 이는 뛰어난 선조들의 공훈의 음덕이라 아니라할 수 없겠다. 공에 대한 기록도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나서 상당부분 고증하여 빛낼수 있다면 더큰 영광이 아닐까 하노라.